김삼기 / 시인, 칼럼니스트
톨스토이 단편작 How much land does a man need?(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인 바흠은 자신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아 땅을 살려고 애썼지만 땅을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시키르인들이 사는 곳에 가면 싼 값에 땅을 많이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바시키르인들의 마을을 찾아가 촌장과 땅 매매계약을 하고 소원을 이루게 됐다며 마냥 좋아했다.
1000루블(약 15000원)만 내고 걸어서 해가 뜰 때 출발해서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반드시 돌어오면 그가 밟는 땅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계약 조건 때문이었다.
꿈에 부푼 바흠은 해가 뜨자마자 길을 떠났고, 가면 갈수록 큰 땅을 가져야겠다는 희망 때문에 점심이 지난 줄도 모르고 계속 출발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났다.
한참 후에야 바흠은 정신을 차리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아가야 넓은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출발점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 해가 서산마루를 막 넘어가려는 순간 겨우 출발점에 도착했다.
가족들과 바시키르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의 성공을 축하했지만, 그러나 바흠은 도착하자마자 죽고 말았다.
결국 그가 얻은 것은 자기가 누울 묏자리만큼의 땅이었다.
톨스토이는 가난한 소작농 바흠이 땅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욕망으로 여겨 130여 년 전 당시 욕망으로 무너져가는 사회상을 고발했고, 그 후 많은 평론가들도 이 작품을 욕망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과연 바흠의 꿈이 한낱 개인의 욕심에서 나오는 욕망이었을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흠이 땅을 소유하고 싶어 했던 것과 큰 땅을 꿈꿨던 것은 순수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바흠이 점심을 기점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은 욕망의 문제가 아닌 방법의 문제였을 뿐이다.
우리가 초등학생 때 장래 희망란에 대통령이나 장군 그리고 회장으로 기재해도, 당시 우리의 희망을 욕망이라고 말한 선생님은 한 명도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전교 1등하기 위해 밤새 공부하다 쓰려져 병원에 실려 가는 학생에게 욕망이 많은 학생이라고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희망이 크다고 희망을 쟁취하는 방법이 잘 못 됐다고 희망을 욕망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라는 제목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으로 ‘바흠이 얻은 것은 자기가 누울 묏자리만큼의 땅이었다’고 표현한 톨스토이나 이를 욕망이라는 잣대로 바라보는 평론가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싶지 읺다.
가정과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큰 희망을 가져야 했고, 큰 땅을 소유하겠다는 신념으로 죽기까지 뛰었던 바흠에게 우리 사회가 오히려 박수를 보내야 한다.
장래 희망란에 대통령이라고 썼던 초등학생이나 전교 1등 하기 위해 밤새다 쓰려져 병원에 실려 갔던 고등학생에게 꿈이 크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이라고 박수를 보내듯이. 우리 사회가 바름 같은 가장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바흠이 하루 종일 걸어서 얻을 수 있는 큰 땅보다 자그마한 바흠의 묏자리가 훨씬 더 크다고 애써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가장들이 꿈꿨던 거대한 비전보다 작지만 지금 가장들이 갖고 있는 소박한 꿈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How much land does a man need?
도시에서는 1인당 30평(집,마당,정원,텃밭 등)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단상]
앞으로 모든 국민에게 1인당 100평씩 공짜로 주는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습니다.